자유 게시판
약 20여년 전인 1989년 2월 9일 병원에서 입원 중 혼수 상태에 빠져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난 것이지요. (당시 위암이었다고 합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만화 작업을 하고 그야말로 쉴새 없이 일을 하며 병에 걸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말리는 직원들에게 "제발 일하게 해주세요."라고 사정하며 일에 매달렸다는 그...
결국, 이런 생활이 화근을 부른 것인지 72세(만 70세)의 나이로 위암으로 사망했지만, 그의 영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런 데즈카 오사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이 글은 지금은 폐간된 모 잡지 2005년 12월호에 기고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했기에 시간 표현 등이 다소 어긋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0여년 전인 2003년. 일본 전역에서 상당히 인상적이고 즐거운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름인 즉슨, "아톰 탄생의 해 기념식." 바로, 어린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인간의 로봇 친구", 아톰이 -작품 설정 상- 태어난 해를 기념하기 위한 대전이었다.
[ 부활하는 아톰? 만화 주인공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
한 지역에 그치지 않고 일본 전역을 아우르는 큰 규모의 행사. 일본의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그런 상황이, -어찌 생각하면- 평범한 만화 캐릭터에 지나지 않는 존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만화라는 한 문화로 시작하여 세계적으로도 손꼽는 경제 대국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힘... 그리고 이제는 그 나라를 벗어나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는 그 영향... 그것은 바로 단 한 사람-아니 신?-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 만화 신의 탄생 이야기
만화를 사랑하는 팬들 대부분-일부 제외-에게서 아톰의 아버지니, 재패니메이션의 창시자... 등으로 불리기 보다는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 하지만, 그가 태어난 1928년 11월 3일은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한마디로 평범한 날이었던 것 같다.(같다라는 것은 그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없기 때문...) 흔한 성자들의 탄생 때처럼 별이 반짝인다거나, 혜성이 하늘을 빛내는 일도 없고 무엇보다도 태몽 같은 것도 기록에 없으니, 한 마디로 지극히 보통 사람의 탄생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한 발짝, 아니 자리에 앉아서도 수많은 만화를 접하게 되는 지금과는 달리 만화 자체가 거의 존재치 않았던 당시, 어린 시절부터 종이에다 만화(그것도 제대로 된 스토리를 가진 작품)들을 그리는걸 취미로 삼았던 소년이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신의 데뷔작, 마아짱의 일기장 ]
그것도, 의학 전문부에 입학한 지 1년 만에 신문에서 만화가로 데뷔했다면 말이다. 1946년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マアチャンの日記帳)>. 그의 인기에 힘입어 지금도 다시 발매되고 있는 바로 이 작품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활약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47년 스티븐슨 원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작품 <신 보물섬(新宝島)>을 통해서 그는 이제까지의 만화가 보여주었던 단순하고 짧은 이야기 구조를 벗어나 인물과 내용이 살아 숨쉬는 듯한 연출과 묘사를 통해 "그림이 움직인다!"는 등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해적과 대결하며 보물섬을 모험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당시 전쟁 직후의 황폐한 생활 속에서도 자그마치 40만부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이른바 "만화적인 연출"을 탄생시키며 데즈카 오사무 전설의 막을 올린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1952년. 2004년에 일본 열도를 들끓게 만들었던 전설적인 걸작 <철완 아톰(鉄腕アトム)>, 그리고 -역시 국내에서 TV로 인기를 모았던- 데즈카판 <서유기>의 원작, <나의 손오공(僕の孫悟空)> 등을 연재하면서 유명작가로 부상한 데즈카 오사무. 그리고 다음 해에는 <사파이어 왕자>란 이름으로 국내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남장 왕녀의 활약을 그린 걸작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로서 소녀만화(국내에선 순정만화)의 가능성을 선보였다.
그 후에도 다채로운 만화로 이름을 떨친 그가 재패니메이션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58년 토에이의 동화 <서유기(西遊記)> 구성을 담당하면서.
여기서 만화 이상의 가능성을 깨닫게 된 그는 1961년. 그 스스로의 투자로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 동화부를 창설하고 그로부터 2년 후.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을 등장시킨 것이다.
당시 일본 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오직 극장용의 애니메이션 밖에 없던 시절, 1~2시간짜리 애니메이션을 최소한 반년, 길게는 2년 이상에 걸쳐 완성하던 그 시기에 매주 30분 정도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작업은 당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후일 "만화의 신"이라 불리게 될 그 사나이는 해냈다. 그것도 그 스스로 원화에서부터 때로는 동화까지 맡으면서...
때로는 병으로 반쯤 죽어나는 상황에서 이불을 두르고 작업을 하면서도 "도저히 일정을 맞출 수 없습니다. 그만 쉬세요. 내친김에 저희도 좀 쉬죠.(^^)"라는 스텝에게 무릎 꿇고 사정하면서 "제발 하게 해 주세요...(해 주세요가 아님.)"라는 비화까지 존재하는 데즈카 오사무. 캐릭터 상품이나 DVD 등으로 제작비를 벌어들이는 현재의 애니메이션 시장과는 달리 몇 개 안 되는 광고 외의 수입원이 전혀 없던 당시의 TV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만화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쏟아 부으며 그야말로 '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상황을 그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그는 일본의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라는 세계를 탄생시킨 것이다.
물론, 부업(^^)으로 돈을 벌면서 그야말로 무료 봉사로 애니메이터 역할까지 했던 그로 인하여 일본 애니메이터들의 급료가 지극히 저렴하게 결정되었다며, 후일 미야자키 하야호(*) 등의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데즈카 오사무야 부업으로 돈을 번다지만, 애니메이터들은 그럴 수도 없잖아!") 60~70년대 초에 걸친 그의 전성기. 데즈카 오사무의 활약은 그야말로 신의 그것에 필적할 정도. 수입이나 작품의 양은 진정으로 상상을 초월했지만, 작업 속도 역시 "가속 장치를 부착했다"는 평까지 들었던 전성기의 이시노모리 쇼타로(*)를 능가할 정도였으니...
그리하여 그는 <철완 아톰>이후, 그가 동화의 공부에 큰 도움을 받았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밤비>에서 모티브를 얻은-그리고 후일 <라이언킹>에 영향을 준- <정글의 왕자 레오(ジャングル大帝,정글대제)> 등 수많은 작품을 성공시켰다.
[ 그를 기억하는 우표가 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
하지만, 1970년대 초에 이르러 데즈카의 신에 필적하는 활동에도 어려움이 생겼다. 데뷔작 이래 그때까지 쉬지 않고 대작을 쏟아냈던 그였지만, 왠지 필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듣게 된 것.
그의 활약에 감동까지 하며 그의 노력에 박수를 그치지 않았던 만화계였지만, 이제는 진정으로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리하여 이제까지와는 달리 마지막으로 그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마지막으로 맡기고자 했다.
[ 엄청난 흉터에 다른 머리색. 검은 코트라는... 도저히 의사로는 보이지 않는 그가 수많은 기적을 탄생시킨다. (C) 데즈카 프로덕션 ]
[ 꾸준하게 인기를 누리는 작품이지만, 데즈카 오사무의 죽음으로 미완의 작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그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인 <블랙잭(ブラックジャック)>. 의학 전문부라는 전공을 살렸다고 볼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