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추천
여러분이 보신 작품 중에서 좋은 작품을 소개해 주세요.
장르 | SF, 판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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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감독 | 몬티 쿡 |
나라 | 미국 |
번역자 | 김성일 |
*어제 북팔 강연을 듣고, '이런 것도 굉장히 훌륭한 판타지다'라는 생각이 들어 전에 써서 다른 곳에 올린 바 있는 TRPG 룰북 리뷰를 여기도 한 번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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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픽션이 아니라 TRPG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룰북이라는 것을 우선 명확히 밝혀 둡니다.
몬티 쿡, 도서출판 초여명, 2015년 7월
1. 들어가는 글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초유의 대성공을 거둔 것을 기점으로, 한국 장르문학계에서 ‘검과 마법 중세 판타지(이하 검마 판타지)는 이러저러하다’는 확고한 원형 심상(Archetype)이 뿌리를 내렸다. 물론 한국 작가의 작품만 따져도 그 이전에 이미 임달영의 『레기오스』와 김근우의 『바람의 마도사』가 있었지만 하이텔에서 연재되었던 『드래곤 라자』는 PC 통신 붐이 지나고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당시의 시대상과 맞물려 극소수 매니아들의 취향이었던 이 장르를 보편화시켰고, ‘긴 수명을 지니고 있으며 아름답고 고고한 엘프’ ‘강인하고 고집 센 드워프’ ‘탐욕과 지혜를 동시에 갖춘 드래곤’ 등의 개념을 한국 장르문학 계에서 실질적으로 최초로 확립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확립된 개념들은 비록 거칠고 성긴 형태로나마 한국의 장르 창작자와 독자들이 공유하는 무의식의 일부가 되었다. 그 이후 이영도 자신은 후속작들을 통해 꾸준히 작가로서의 향상을 보여주며 발전해 나갔으나, 『드래곤 라자』를 이데아로 삼은 모방작과 아류작들이 범람하면서 그러한 원형 심상은 서로를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로 삼아서 역설적으로 열화와 자기복제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방작과 아류작들이 킬링 타임용으로 각광받음과 함께 이 장르에 대해선 장르 문학과 비교적 거리가 있는 일반 독자들도 예의 원형 심상을 막연하게나마 공유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엘프나 드래곤이나 마법 같은 게 ‘판타지’라는 타이틀과는 달리 전혀 환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엘프는 항상 청순하며 주인공의 사랑을 갈구하는 미녀고 드래곤은 인간이나 엘프로 변해 그들 틈에 섞여 살며 긴 삶의 지루함을 견디다가 주인공에게 마법 무구나 재보를 퍼주는 역할이라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도식이 고착되고, 마법 역시도 신비성과 초월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9서클 대마법사’라는 한 문장으로 그 마법사의 힘(특히 전투능력)을 수치화해서 나타내는 기계적인 척도가 되어 버렸다. 2015년 현재 이러한 원형 심상에 의존하는 비슷비슷한 내용의 검마 판타지 작품들은 퓨전 판타지와 게임 판타지에 밀려 하위 장르로서의 생명력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다. 그리고 퓨전 판타지와 게임 판타지 역시도 게임, 인터넷, 드라마 등 다른 종류의 유희거리들에 밀려나며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누메네라』는,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누메네라』의 배경은 10억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의 지구다. 2015년 현재를 기준으로 했을 때, 1만 년 전의 인간은 간신히 부족 사회를 이뤄 살기 시작했다. 약 6천 년 전 바빌론과 이집트에서 최초의 도시국가가 생겨나고 최초의 왕이 그곳을 다스렸다. 2천 여 년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다. 그리고 불과 최근 몇 백 년 사이에 제국주의와 민족국가, 산업혁명과 대량생산, 세계대전과 원자폭탄, 컴퓨터와 인터넷이 등장했고 이제 증강현실과 바이오테크의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 세계에서는 그런 식으로 극한까지 과학이 발달한 문명이 지난 10억년 동안 8차례에 걸쳐 번성했다가 사라졌고(멸망했을 수도 있고, 지구를 떠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지구 자체와 합쳐졌을 수도 있다) 그 잔해에서 새로이 시작된 9번째의 문명이 펼쳐지고 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지금의 세계를 제 9세계라고 부른다. 지난 시대의 문명 중 어떤 문명은 태양계를 정복하고 은하 단위로 뻗었던 우주 문명을 건설했다. 어떤 문명은 평행 세계를 발견하고 교류했다. 어떤 문명은 행성의 궤도를 바꾸고 새로운 태양을 만들어냈다. 어떤 문명은 외계인과 만났다. 즉, 지난 8번에 걸친 흥망성쇠의 주기 동안 인류는 지금의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과학 기술을 개발하고 그 정점에 도달한 적이 있다. 그리고 9세계가 시작된 지금도 지난 세계들이 남긴 과학기술들의 유산은 지구 각지에 온갖 형태로 흩어져 있고, 인간들은 그러한 유산들이 한 때 어떤 목적에 따라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 짐작조차도 못한 채 그를 발굴해 내어서는 나름의 새로운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누메네라』는 먼 미래의 지구와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을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과학기술이 이야기의 소재가 된다는 점에 있어 SF적이다. 그리고 그 과학기술이 새롭고 독특하며 신비롭다는 점에 있어 판타지적이다. 뻔하고 지루한 대상이 되 버린 엘프와 드워프와 드래곤 대신, 정말로 낯설고 독특한 도구와 생물들, 예측할 수 없는 자연- 즉, 진정한 판타지 세계가 사람들 앞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게임의 참가자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통해 이 멋진 신세계를 탐험하고, 고대의 정체 모를 유물을 찾아내고, 독특한 괴물들(동물인 동시에 식물이라거나, 생체와 기계가 합쳐져 있다거나, 다른 차원에 본체가 있다거나)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 작품에 관해
새로운 세계, 새로운 게임
작가 몬티 쿡의 서문. 몬티 쿡은 국내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D&D에 있어서 개리 가이객스, 에드 그린우드와 더불어 빼놓고 논할 수 없는 인물이다. 환상성을 잃고 진부해진 한국 검마 판타지 장르의 이데아인 『드래곤 라자』가 큰 빚을 지고 있는 던전스 앤 드래곤즈의 작가 겸 개발자 중 하나인 몬티 쿡이 이토록 독특한 『누메네라』의 세상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재미있는 역설이다. 제 9세계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짧은 단편 소설도 첨부되어 있다.
제1부:시작하기
제 9세계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개관과, 이 세계를 배경으로 실제 TRPG 플레이를 하기 위한 기본 개념을 소개하는 챕터.
제2부:캐릭터
캐릭터 제작 룰을 다루고 있는 챕터. D&D가 고 레벨로 올라갈수록 온갖 장비와 특수 능력, 마법 주문으로 캐릭터 시트가 빽빽해져 가고 겁스 같은 경우는 초보자의 경우 캐릭터 만드는 데에만 몇 시간이 걸리는 것 달리 『누메네라』는 무척이나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능력치는 단 3종류뿐이고, ‘캐릭터 클래스’도 전사나 군인에 해당하며 전투기술이 뛰어난 ‘글레이브’, 순찰자나 탐험가에 해당하며 다재다능한 ‘잭’, 학자나 마법사에 해당하며 에소테리라는 특수 능력을 가진 ‘나노’ 셋뿐이다. 이를 기본으로 해서 ‘날랜’이나 ‘은밀한’ ‘매력적인’ 등의 수식어를 붙이고 ‘뒷골목을 다닌다’ ‘무기에 통달해 있다’ ‘야생에서 살아간다’ 등의 특징을 추가해 개성을 확보한다. 수식어와 특징은 캐릭터 제작의 핵심으로, 이에 따라 초기 능력치가 조정되기도 하고 돈이나 장비를 추가로 갖고 시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캐릭터의 등급-레벨과 비슷한 개념이다-이 오름에 따라 저마다 다른 독특한 능력들을 얻게 된다. 이를 종합하면 최종적으로 캐릭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문장이 된다. 예를 들면 “‘불범’(이름)은 ‘은밀한’(수식어) ‘글레이브’(유형)이며, ‘뛰어난 솜씨로 사냥한다’(특징).”라는 식이 되고, ‘은밀한’ 수식어로 인해 처음부터 숨기와 곡예, 도약 등의 기술에 뛰어나며 ‘뛰어난 솜씨로 사냥한다’는 특징으로 인해 등급이 오를수록 ‘누군가가 지나가며 남긴 흔적을 파악한다’거나 ‘사냥감을 주의 깊게 살펴 특기와 약점을 알아낸다’ 등의 능력을 얻게 된다.
제3부:플레이
게임 룰을 다루고 있는 챕터. 20면체 주사위 하나로 모든 판정이 처리되는, 직관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룰이 눈에 띈다. 전투를 할 때건, 특정 장소를 수색할 때건, 무언가를 기억해낼 때건, 1에서 10 사이로 기본 난이도가 매겨지고 그 난이도에 3을 곱해 최종 목표치를 책정한 뒤 20면체를 굴리고 보정치를 더해 목표치를 넘기면 성공하는 형식. 추가로 캐릭터의 기능 여부나 ‘사이퍼(1회용 아이템. 상세한 것은 후술)’ 사용 여부에 따라 난이도를 낮추거나 보정치가 더해진다.
제4부:세계
제 9세계에 대한 보다 상세한 배경 설명이 되어 있는 챕터. 8번째의 문명이 사라지고, 9세계가 시작된 지는 아직 얼마 되지 않은 시점으로, 중세에 해당하는 무렵이다. 물론 이 ‘중세’라는 관점은 어디까지나 2015년 기준으로 보기에 지구의 중세 유럽과 비슷한 사회 구조(왕국, 귀족, 영지에 기반한 봉건제도 등)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옛날에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문명들이 번영했다’는 사실을 추상적으로나마 알고 있다. 다만 그걸 과학 기술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다.
이 9개의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호박석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진실회라는 종교를 따르고, 진실회의 사제들은 기독교적인 신을 섬기는 성직자라기보다는 세계 각지에서 끝없이 발견되는 고대의 유물(이 유물들을,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누메네라’라고 부른다)들을 채집하고 연구하는 학자에 더 가깝다. 누메네라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태고사제’라고 부르며, 교황청이 9개 국가들 간에 큰 권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지구의 중세 유럽을 석권했던 가톨릭의 그것과는 달리 학자와 기술자들의 집단이라는 점이 제 9세계의 분위기를 독특하게 채색한다. 9개 국가와 군소 부족들이 캐릭터들의 주된 활동 영역이 되는 ‘본터전’을 구성하고 ‘본터전’ 너머에는 아직 완전히 탐사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인 ‘저너머땅’이 존재한다. 이러한 ‘본터전’과 ‘저너머땅’ 각지의 독특한 장소들과 온갖 세력들이 소개되어 있다. 기묘하게 생긴 수정이 하늘을 떠다니는 거대한 평원, 지나간 시대들의 풍경이 환상처럼 보이는 곳, 전체가 거대한 파이프라인으로 이뤄진 도시, 나이를 먹지 않는 원시 부족이 살고 있는 밀림 등, 하나하나가 독특하고 매혹적인 설정들로 가득하다.
제5부:생물과 NPC들
제 9 세계의 온갖 괴물들과 유명 인사들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 챕터. 제 9세계는 10억 년 후의 세계라는 그 특성에 걸맞게, 소나 말, 돼지 같은 2015년에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짐승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짐승들은 이제 멸종했거나,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외양과 생물학적 특성을 갖게끔 진화했거나, 이전 시대에서 지속된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변모했거나, 기계와 합쳐졌거나(혹은 애초에 기계로 만들어졌거나), 다른 차원 또는 행성에서 전파되어 와서는 생태계를 구성한다. 허공을 떠다니면서 분해 광선을 쏴서 목표를 공격하는 미친 자동인형(원래는 쓰레기 처리용도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옛날에 벌어진 우주 규모의 전쟁을 위해 생산된 전투 로봇, 환상을 보게 하는 포자를 뿜어내는 식인 식물, 버섯 같은 기생체와 짐승 같은 본체가 공생하며 상호 보완을 하는 생물, 지성을 갖고 있으며 도시만큼이나 거대한 고래, 언젠가 지구를 찾아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리고서 지구에 정착하게 된 외계인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괴물들은 하나하나가 특이하며, 쥐나 도마뱀에 해당하는- 싸워 물리칠 대상으로서는 사소한 존재부터 단독으로 군대를 상대하고 도시를 파괴할 수 있는 강대한 괴물에 이르기까지 개성 있는 외양과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괴물들과 싸우고 난 보상 역시도 독특하다. D&D에서는, 화폐 경제체제는 커녕 지성조차 갖고 있지 않은 괴물들도 뱃속이나 둥지에 ‘모험가’들이 쓸 만한 금화나 보석 등을 쌓아두곤 한다. 위화감이 들 법도 하지만 너무나도 당연시되어 있어서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제 9세계의 괴물들은 대부분 유전공학적 또는 기계적으로 인간이나 다른 무언가에 의해 개량이 되어 있다는 걸 전제하고 있다. 인적 없는 깊은 숲 속에서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고 살던 거대 곤충 같은 괴물조차도 예외는 아니라서, 그 시체를 뒤지면 캐릭터들이 쓸 만한 사이퍼라는 독특한 도구나 물품이 나온다는 식으로 보상이 주어진다.
제6부:누메네라
이 책의 제목인 동시에 주제인, ‘누메네라’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챕터. 이미 『플레인스케이프』에서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세계와 개성 있는 괴물 및 인물들을 제시해 보인 몬티 쿡의 역량이 한껏 드러나는 챕터로, 개인적으로는 제5부와 더불어서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은 챕터이기도 하다. 제 9세계에서 ‘누메네라’라는 말은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 그리고 지구의 지난 시대에서 비롯된 것들을 가리킨다. 2015년의 관점에서 보자면 각종 장치, 기계, 탈것, 로봇, 컴퓨터, 무기, 약물, 인공위성 등등이며 넓게 용어를 정의하자면 유전공학을 통해 새로 만들어진 생물과 기계 생명체, 다른 차원과 우주에서 온 존재도 포함된다. 좁게 정의하면 ‘사이퍼’와 ‘아티팩트’, 그리고 ‘신기품’만을 말한다.
한국의 검마 판타지에서 마법은 소수 엘리트들의 것이다. 열화와 자기복제를 거듭한 이른바 ‘양산형 판타지 소설’에서조차도 늙은 드래곤이나 ‘9서클 대마법사’는 특히 희귀하며 더 없이 강대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언급이 빠지질 않는다. 작가의 필력 부족으로 인해 그토록 희소하고 강력한 존재에게 어울리는 무게감이나 전투능력 외의 역량에 대한 묘사가 빈약할 뿐이다. 하지만 제 9세계에서 누메네라는 세계 곳곳에, 마치 나무나 바위처럼 존재한다. 그 능력을 이해하고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 뿐이다. 커다란 송곳처럼 생겼고, 룰 상으로도 무기처럼 쓰이는 누메네라는 어쩌면 원래는 거대한 컴퓨터의 반도체였을 수도 있다. 커다란 방패처럼 생겼고 방패처럼 쓰이는 누메네라는 어쩌면 원래는 액체연료 저장 탱크의 해치였을 수도 있다. 주변의 빛을 굴절시켜서 사용자를 투명하게 하는 누메네라는 어쩌면 원래는 입자 가속기 부속이었을 수도 있다. 책에서는 제 9세계에서 누메네라가 어떠한 위치를 갖고 있는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면서 마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9세계에 누메네라를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에 부정할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판타지에 등장
하는 마법보다 더 흔하다는 점도 차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메네라
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다양하고 예측이 어렵기 때문에
기이하면서 신비합니다. …(중략)… 마을의 발명가나 클라베의 태고사제들이
단순히 기계만이 아니라 기술 자체를 발견한 경우도 존재합니다. 기술을
알고 있으니, 그 발명가나 태고사제는 관련된 장치를 만들거나, 약을 조제
하거나, 공정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어느 한 가지만
엄청나게 발달해 있을 수 있습니다. 자동인형에 쟁기를 묶어 밭을 가는 농부들,
초가지붕에 내화 스프레이를 뿌린 마을, 사슬 갑옷과 창으로 무장했지만
단파 무전기가 내장된 무쇠 투구를 쓴 병사들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21세기 사람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갖고 있는 감각은 PC들이 누메네라에 대해
가진 감각과 다르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제 9세계에서는 역장 보호막 생성기
와 무전기가 단순히 마법적인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둘 사이에 기술적 수준
차이가 있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사실 무전기 쪽이 더 강력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응용 범위가 넓고, 효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9세계 사람
들은 과학기술을 서로 비교할 정도의 지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
대단하고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이퍼’는 작고, 단순하고, 비교적 빠르게 쓸 수 있는 1회용 물품이다. 비유하자면 D&D의 ‘힐링 포션’이나 ‘주문 스크롤’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이퍼의 독특한 점은, 본질적으로 특정 마법 주문의 효과를 모사하는 D&D의 1회용 아이템과는 달리 100여 종류에 달하며 저마다 독특한 별개의 효과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장비나 보물이라기엔 플레이어가 선택하지 않은 캐릭터의 능력에 가깝다. 사이퍼의 활용을 통해 플레이는 보다 예측하기 어렵고, 역동적이게 된다. 괴물과의 전투나 탐색을 통해 손쉽게 얻을 수 있으며, 빠르게 써 버리고 새로운 사이퍼를 얻으라고 룰에 명시되어 있다. 1회용이기 때문에, ‘저 레벨 마법 아이템’과는 달리 위력이 아무리 강해도 상관없다. 이야기 내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1등급 캐릭터여도 사이퍼 활용을 통해 서사시적인 업적을 달성할 수 있다.
‘아티팩트’는 사이퍼와 달리 ‘이것은 무기다’ ‘저것은 갑옷이다’라는 식으로 비교적 용법이 뚜렷하며, 계속해서 쓸 수 있는 반영구적인 물품들이다. 저마다 충전량이 지정되어 있고, 쓸 때마다 고갈되지 않는 지를 판정해야 한다. 고대 유적에서 흔히 발견된다. 사이퍼가 1회용품으로서 순간적으로 인상적이고 강력한 능력을 캐릭터에게 부여해준다면, 아티팩트는 보다 장기적으로 깊고, 폭 넓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캐릭터에게 준다. 플레이 도중에 아티팩트를 얻었는지 여부에 따라 경험치를 얻기도 한다.
‘신기품’은 사이퍼나 아티팩트처럼 실용적인 용도는 없지만 그 자체로 제 9세계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소소한 물건들이다. 가만히 놔두면 스스로 형태를 바꾸는 고무찰흙, 저절로 조금씩 자라나는 나무 막대기, 비단 재질 같지만 결코 더럽혀지거나 찢어지지 않는 스카프, 태우면 동물 모양의 연기가 나는 성냥 등이 있다.
제7부:플레이의 운영
게임 플레이를 위해 제 3부에서 설명되어 있는 룰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이며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조언을 다룬 챕터. 주로 마스터를 위한 조언이지만 플레이어로서도 읽어볼 가치가 있다. 이야기 내의 상황에 따른 난이도 책정 요령, 마스터로서 캐릭터에게 경험치를 주고 그 대신 극적인 상황(주로 위험 상황)에 밀어 넣기 좋은 타이밍과 그 극적인 상황의 예시, 사이퍼와 아티팩트를 분배하는 법, 그리고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노하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 몬티 쿡의 오랜 경험을 거친 조언들이 많기에 『누메네라』를 할 생각이 없더라도 TRPG를 하는 입장이라면 한 번 쯤 읽어볼 가치가 있다.
제8부:시나리오
예시 시나리오 4개가 수록되어 있는 챕터. 처음 플레이하는 마스터를 위한 튜토리얼 성격의 간단하면서도 기본이 잘 갖춰진 「보레갈의 베올」, 일정 지역을 돌아다니며 비선형적으로 탐험을 하기 위한 조언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 「씨앗배」, 즉석에서 상황을 만들어내어 플레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감춰진 대가」, 권력에 미친 조직과 세계를 바꿀 만한 힘을 둘러싼 스케일 큰 이야기를 다룬 「세 개의 성소」 라는 4편의 시나리오가 실려 있다.
제9부:부록들
용어집과 색인, 참고 자료 등이 수록되어 있는 챕터.
3. 나오는 글
『반지의 제왕』에서 로스로리엔의 군주 갈라드리엘은, 자신의 종족을 영원히 다스리는 불멸의 힘과 아름다움을 지닌 여왕이 되겠다는 수천 년에 걸친 갈망을 결국 포기하고서 반지 운반자 프로도 배긴스에게 “자신은 서쪽으로 떠나서 갈라드리엘로 남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 선언은 무한한 권력을 약속하는 반지의 유혹을 떨쳐내는 고결함의 증명인 동시에, 마치 노을이 저무는 것처럼 이 세계에서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영원히 떠나가야만 한다는- 엘프라는 종족 모두에게 지워진 운명에 대한 비탄의 증명이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과 강물 위를 떠가는 기름이 그러하듯, 현대의 물질문명이 고대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파괴해 가리라는 톨킨의 현실 의식의 반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확대해 보자면, 현실에서 ‘환상성’은 압도당하고 점차 타산적이고 무미건조한 인간관계,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온갖 상품들, 건강식품과 보험 광고에 자리를 내주게 되는 것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 『누메네라』에서 묘사되는 10억 년 후의 지구- 제 9세계는 그토록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넓고, 미지는 넘쳐난다. 물론 이 책 속에서 묘사되는 제 9세계에는, 중간계와 같은 찬란한 후광은 없다. 프로도 배긴스와 반지 원정대를 배에 태워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노래하던 갈라드리엘의 그 고귀한 비탄도, 반지 운반자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얼마 되지도 않는 군대를 각지에서 모아 바랏두르의 검은 문 앞에 집결시키던 아라고른의 비장한 결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신 제 9세계는 더 젊고 생생하며, 알아내고 싶은 것과 찾아내고 싶은 것들이 각지에 넘쳐나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신비’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 것이다.
제 9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플레인스케이프:토먼트』의 정신적 후속작임을 선언한 컴퓨터 게임 『토먼트:타이드 오브 누메네라』가 곧 출시될 예정이다.(*)